백제 수도 거발성(居拔城)이란
백제는 542년 (梁大同七年) 남조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당시 기록을 북방어에 능숙한 용서 이씨 이대사의 아들 이연수가 부친의 뒤를 이어 완성된 남북조시대 역사인 북사 (北史)에 백제의 수도는 거발성 (居拔城) 이다 혹 고마성 (固麻城) 이라고 한다.[1] 왕을 (於羅瑕) 백성들이 부르기는 건길지(鞬吉支)라 하고, 왕후를 어륙 (於陸) 이라 한다. 요동에 있던 공손도 를 찾아 갔던 고구려 왕자 발기가 양자강 하류에 정착 했다.[2] 발기(拔奇)가 살던 성이라 백제 수도 거발성 (居拔城) 이라 했다.[3] 발기란 이름이 손책 (孫策)활동기에 나타났다.
발성(拔城)이란 글자가 진서에 실렸다.[4] 그러나 진서 지리지에는 발성 (拔城)이 없다. 진안군(晉安郡)은 서진 시대에 신설하여 진 시대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옛 군이다. 오늘의 복건성 의 복주(福州)의 지명인 진안구(晉安郡)에는 신라 (新羅) 온마(溫麻) 여덟게 현이 있었다.[5] 부견(苻堅)이 요동에서 모용환(慕容桓)을 파멸한 372년에 남쪽에서는 백제 임파왕(百濟, 林邑王)이 조공을 바쳤다. 진문제가 상으로 만들었다 (文帝作相) 는 비미호의 후손이 살던 곳이다. 중국 땅 월주(越州)에 있었다.
조위와 서진 시대에 나타나지 않았던 신라 백제(新羅, 百濟) 란 이름이 북방 세력에 밀려 강남으로 피란을 갔던 동진 말기에 복건성 이남 지역에 나타났다. 사마씨의 흥망을 기술한 진서에 실였다.
서진말기 291년(晉永康元年)에 발성(拔城)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 국운이 쇠할 증조란 풀이를 했다. 서진 말기에 나타난 팔왕의 난(八王-亂)시작이다. 사마의(晉 高祖 宣帝 司馬懿, 179년 ~ 251년) 가 공손연을 토벌하고 비미호(倭)의 후손을 제상으로 임명 했던 발기의 후손이 살던 곳을 발성(拔城)이라 했다.[6] 당시 발성(拔城)은 강북에 있었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 실린 발성(拔城)을 맡길 임자 임나(任那) 라고 했다. 그곳에 공손도 세력과 인척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남아 살던 곳이란 뜻에서 진유고씨 (陳留高氏) 라고 했다. 임나가라(任那加羅)의 발원지다.[7] 박사고흥이 백제 서기를 남겼다는 발해고씨의 발생지이도 하다.
이들이 강남으로 옮겨 갔다. 발기(拔奇) 친구 고대(高岱)를 죽였다는 기록이 오록 (吳錄)에 있고 강남에 발기진(拔奇津)이 나타났다.[8] 자치통감에 발기에 관한 설명에 장소를 숭안현이라 했다.[9] 남제서에 숭안능 (崇安陵)이 있다. 강소성 단양 (江苏丹阳市)에 발기가 정착 했었다.[10]
북송 시절에 만든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북사 내용을 인용 하여 백제 (百濟)역사를 간략히 기록 했다. 삼국 사기 또한 북사 내용을 인용 했다.
다른 이름 고마성:굳을 고 삼 마 “固麻”라고 읽는 글자에 역사가 숨었다.[11] 고(固gù)자는 사방에 요새가 있는 성이란 뜻이다. 마(麻, mā )자는 북방 유목민을 뜻한 글자다. 상나라 말기에 부열의 후손 한 지류가 강남으로 쫒겨가 정착 했던 곳이다. 남아 있던 사람들이 夫餘씨를 택했다고 한다.[12]
삼국지 문소황후 견씨(文昭皇后 甄氏, 183년- 221년) 편에 황후가 눈문을 흘리면서 청하 면서 꼭 임지(任地)로 떠나 겠다다. 고청(固請)이라 했다.[13] 꼭 떠나겠다는 곳이 발해고씨가 남아 진을 치고 있었다. 한때 마부였던 자가 살던 곳이라 하여 어현(圉縣) 사람이라 부르던 원소의 외조카가 발해 고씨다. 병주 일대에 있었던 임나(任那)다.
거발성이 처음 기록된 남조 양(梁, 502년 ~ 557년)때 편술된 금루자 (金樓子)에 발기의 친구 고대를 손책이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14]
담노를 두 글자“檐鲁 簷魯” 로 썼다. 처마를 뜻한 옥담(屋檐) 의략자
지붕이 서로 붙은 길 도시를 뜻한 글자다. 음과 뜻을 살린 어휘가 [처마를 뜻한 옥담(屋檐),길 로(路) ,담벽, 담장, 덕수궁 돌담길]하는 표현이다.
용서이씨 이연수 (李延壽;?-?년)는 부친 이대사(李大師; 570年-628年 ) 의 유업을 이어 받아 남북조 시대(439년 – 589년)의 송(宋)나라, 제(齊) 나라, 양(梁)나라, 진(陳)나라의 역사인 남사(南史)와, 북조 역사서인 북위, 서위, 동위, 북제, 수나라의 역사를 서술 했다 . 그의 역사서는 다른 사서 에는 볼수 없는 내용도 여러 곳에 보인다.
거발성이 함락되었던 시기는 동이의 강국을 이루었던 부여씨의 전성기 였다. 양 태청삼년(梁太清三年;550년)에 점령 당했던 백제 수도 거발성은 강하류에 있었다. 그 지역에 남방불교가 성했다.
해양권을 장악 했던 부여씨가 담로의 하나였던 대동강 하구에 한성(漢城) 을 수도로 정하고 있던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급습으로 살해되였다. 이러한 비보를 듣고 열도에서 돌아와 혼란기를 수습라던 곤지의 아들 동성왕(東城王: 479년~501년) 이 다스렸다. 그의 뒤를 이었던 백제 25대 무녕왕 (武寧王,재위: 501년 – 523년)의 아들의 성왕(聖王, ? ~ 554년) 시절에 거발성이 함락 되었다.[15] 거발성을 빼았은 승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후경의 난이란 문구가 양서와 백제 본기에 실렸다.
후경(侯景, ? ~ 552년)은 갈족(羯族) 으로 북제를 세원던 발해 고씨와 같이 북위(北魏) 동위(東魏)의 장군이었다. 같은 동위의 장군이었던 고양 (高洋)이 선양 받아 업(鄴)수도를 정하여 북제(北齊, 550년 ~ 577년)가 나타났다. 부여씨의 후손이 강남으로 내려가 정착 했던 곳에서 중원의 부여(夫餘)씨가 나타 났다.[16] 북제 이전 부터 왜오왕이 다스렸다는 여섯 나라 “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六國”가 양자강 하류에 부여 가라 신라가 있었다. 백제 거발성을 점령 했던 북방세력 장군이 양서에 후경 열전에 실렸다.[17]
양서의 저자는 이 전환기를 백의 추종자들이 하의 세력에 밀렸고, 그 곳의 원주민이 서주를 괴롭 혔다(昔夷羿亂夏, 犬戎厄周)다라고 비유 했다.
끝.
[1]. 梁書: 東明之後有仇台,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號所治城曰固麻,謂邑曰簷魯,如中國之言郡縣也。其國有二十二簷魯,皆以子弟宗族分據之。其人形長,衣服凈潔。其國近倭,頗有文身者。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呼帽曰冠,襦曰復衫,褲曰褌。其言參諸夏,亦秦、韓之遺俗云。中大通六年、大同七年,累遣使獻方物;并請《涅盤》等經義、《毛詩》博士,並工匠、畫師等,敕並給之。太清三年,不知京師寇賊,猶遣使貢獻;既至,見城闕荒毀,並號慟涕泣。侯景怒,囚執之,及景平,方得還國。
[2]. 三國志 策傳:吳錄曰:時有高岱者.岱字孔文,吳郡人也。受性聦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皆世之英偉也。金樓子 雜記上: 魏操誅文舉,孫策誅高岱,晉相誅嵇康.
[3]. 北史: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其國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處小海南,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餘氏,號「於羅瑕」,百姓呼為「鞬吉支」,夏言並王也。王妻號「於陸」,夏言妃也
[4]. 晉書:大戰。日鬥,下有拔城。日戴者,形如直狀,其上微起,在日上為戴。戴者,德也,國有喜也。永康元年正月,日暈,三重。十月乙未,日闇,黃霧四塞。占曰:「不及三年,下有拔城大戰。」十二月庚戌,日中有黑氣。京房《易傳》曰:「祭天不順茲謂逆,厥異日中有黑氣。
[5]. 晉書: 晉安郡太康三年置。統縣八. 原豐新羅宛平同安候官羅江晉安溫麻. 二年春正月辛丑,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二月,苻堅伐慕容桓於遼東,滅之
[6]. 晉書: 東倭重譯納貢,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是歲,扶南等二十一國、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又數至。泰始初,遣使重譯入貢.
[7]. 北史: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其國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處小海南,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餘氏,號「於羅瑕」,百姓呼為「鞬吉支」,夏言並王也。王妻號「於陸」,夏言妃也
[8].三國志:吳錄曰:時有高岱者. 岱字孔文,吳郡人也。受性聦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皆世之英偉也。
[9].資治通鑑: 識拔奇才,不拘微賤,隨能任使,皆獲其用。與敵對陳,陳,讀曰陣。好不經之舉,好,呼到翻。經,常也。開拔奇之津,津,江河濟渡之要,故以為喻.建州崇安縣南三十里。今崇安有山名武夷,相傳即神仙所宅。峰戀嚴壑,秀拔奇偉,清溪九曲,流出其間。兩崖絕壁,人迹所不到處,往往有枯查插石罅間,以庋舟船棺柩之屬。柩中遺骸,外列陶器,尚且未壞。夷俗所居,而漢祀者即其君長,蓋亦避世之士,生為眾所臣服,沒而傳以為仙也。武夷山中有道士
[10].朱子語類 外任 同安主簿: 亦不能得!又見崇安縣丞用淮西漕使印。」人傑.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崇安陵是中国南北朝时文惠太子萧长懋的陵墓. 位于江苏丹阳市.
[11]. dictionary:固麻: 固:堅也,一也,常也,故也,四塞也. 《南史·百濟傳》百濟國號王所都城曰固麻,邑曰簷魯,如中國言郡縣也。又《山海經》有壽麻國。晉師及秦師戰于麻隧。《註》秦地
[12]. 宋明 廣韻:餘:殘也,䞉也,皆也,饒也,又姓晉有餘頠 晉卿韓宣子之後有名餘子者奔於齊號韓餘氏又傳餘氏本自傅說說旣爲相其後有留於傅巖者因號傅餘氏秦亂自淸河入吳漢興還本郡餘不還者曰傅氏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13]. 三國志 文昭甄皇后:袁紹為中子熈納之。熈出為幽州,后留養姑。及兾州平,文帝納后於鄴,有寵,生明帝及東鄉公主. 帝曰:「任性狷急不婉順,前後忿吾非一,是以遣之耳。」后流涕固請曰:「妾受敬遇之恩,衆人所知,必謂任之出,是妾之由。
[14]. 金樓子 雜記上:成湯誅獨木,管仲誅史符,呂望誅任卨,魏操誅文舉,孫策誅高岱,黃祖誅禰衡,晉相誅嵇康,漢宣誅楊惲,此豈關大盜者,深防政術,腹誹心謗,不可全也
[15]. 三國史記 百濟本紀第四: ,諱牟大或作摩牟摩帝。文周王弟昆支之子.靺鞨襲破漢山城,移都於泗●一名所夫里。,國號南扶餘。冬十月,王不知梁京師有寇賊,遣使朝貢。使人旣至,見城闕荒毀,●號泣於端門外,行路見者,莫不灑淚。侯景聞之,大怒,執囚之。及景平,方得還國. 梁書:太清三年,不知京師寇賊,猶遣使貢獻;既至,見城闕荒毀,並號慟涕泣.侯景怒,囚執之,及景平,方得還國。
和帝中興辛巳已上為上古已下為中古第二十五虎寧王名斯摩即東城第二子
炤知一云毗處。麻立干立,慈悲王長子:十五年春三月,百濟王牟大遣使請婚,王以伊伐飡比智女送之。將軍實竹等與高勾麗戰薩水之原,不克,退保犬牙城。高勾麗兵圍之,百濟王牟大遣兵三千救觧圍。
[16]. 宋明 廣韻:餘:殘也,䞉也,皆也,饒也,又姓晉有餘頠 晉卿韓宣子之後有名餘子者奔於齊號韓餘氏又傳餘氏本自傅說說旣爲相其後有留於傅巖者因號傅餘氏秦亂自淸河入吳漢興還本郡餘不還者曰傅氏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17]. 梁書 侯景: 朔方人,或云鴈門人,臣昔與魏丞相高王並肩戮力,共平災釁,扶危戴主,史臣曰。昔夷羿亂夏,犬戎厄周,漢則莽、卓流災,晉則敦、玄構禍,方之羯賊,有逾其酷,悲夫.
끝
The original was in the face book: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