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에 한국 상고사가 숨어 있다(Go Game. Ancient Korean History embedded.) 는 표제의 단행본을 준비하다 뜻밖의 사실을 찾았다.
진시황의 선조가 살던 섬서성을 익주 (益州)라 했다. 진을 백익의 후손이 살던 곳 (秦:伯益之後所封國)이라 했다. 사기 진시황 본기에 이일(異日) 한왕이 영토와 새 (璽) 를 바쳤다가 후에 약속을 어기고 한 조 위 세 나라가 합종 하여 진(秦) 나라에 반항 했다. 한왕을 잡아 처형하고 조나라 왕(趙王)이 사죄하여 인질을 돌려 보냈다. [1]
진시황(秦始皇帝:기원전 259년 – 기원전 210년)이 천하를 통일 하는 과정에 조공자 가(趙公子嘉)는 동쪽으로 도망가서 대왕(代王嘉)이 되었다. 진시황이 제위 26년에 한왕 납지교새 (韓王納地效璽)라는 문구가 있다. [2] 시황본기에 실린 옥새(玉璽) 란 글자의 뜻을 보면, 진시황제가 화씨지벽(和氏之璧)으로 만든 옥새를 중산국으로 알려진 금미달 영역을 빼앗었던 조(趙)나라로 부터 얻었다. 그후 제위 36년에 동쪽으로 순행 하다 강에서 잃어 버렸던 벽 (渡江所沈璧) 을 얻었다. 이를 화씨벽(和氏璧)이라 한다. 옛적 고조선 영역 이였던 진 (晉)의 제후국이 셋으로 부서졌다. 그 전후 역사의 흐름을 보면, 호타하 연안을 세 지도자가 다투었다는 뜻의 상형 글자 상(𠭨,籀文桑)자를 썼다.
[다음사전에는 바둑판을 추평(楸枰)이라 했다. 금루자 흥왕(金樓子 興王)편에 문상위국(文桑為局) 으로 바둑판을, 바둑알은 물소 뿔과 상아(犀象為子)로 만들었다고 했다. 신라와 가야의 성씨인 김(金)씨 원조가 되는 태호 복희씨, 소호금천씨가 모두 궁쌍(窮桑)에서 살았다. 문상(文桑)이란 산서성 대현 오대산 일대, 즉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 지역을 흐르는 여울 상간하 (桑乾河) 일대 상자지향 (桑梓之鄕) 에서 쓴던 글자란 뜻이다. 그곳을 글안족이 사는 마을 연도(𨜒: 燕都)라 했다.
글안(契丹)족이 긁어서 상형문자를 만들어 글문이라 읽는다. 먼곳에 산다하여 멀요 (遼)라 했다. 멀요를 음차한 글자가 바둑을 창안 했다는 요임금(堯教丹朱棋)이다.
바둑판은 천부경(天符經)도형이 그려진 가래나무(추楸 ,재 梓 榟)판이었고, 바둑알은 제일 귀한 물건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3]
인도에 전해져 “가야 사람들이 쓰던 곳집 보관 되었다. 그에서 나온 문양을 본떠 한글을 창안 했다”고 한다. 금미달 연도(𨜒:燕都)에 있던 천부경(天符經)도형이 바둑판 (文桑為局)으로 쓰였다. 바둑 판에 그려진 입구“口자 ”모양에서 “ㄱ ㄴ ㄷ ㄹ ㅁ ㅂ” 같은 모양을 구상 했다고 볼수도 있다. 한글 창안 학설에는 금니(金泥)란 글자가 나타난다. 치수(治水) 성수(聖水) 역수 (易水) 라고도 불렀던, 호타하(滹沱河) 연안 가람(伽藍)에 살던 금(金)나라의 스님泥)이란 뜻이라고 본다. 금(金)나라가 글안의 수도, 즉 원기불교가 들어 왔던 금미달 연도(𨜒:燕都)를 점령 했다. 뽕나무 상(桑)자는 옛적에 세 지도자가 함께(𠭨,籀文桑)라는 상형글자다. 이를 주 선왕때 태사 주가 만든 대전 (籀:史籀周宣王太史名造大篆)자라고 한다.
[1].史記 秦王初并天下,令丞相、御史曰:「異日韓王納地效璽, 請為藩臣,已而倍約,與趙、 魏合從畔秦,故興兵誅之,虜其王。寡人以為善,庶幾息兵革。趙王使其相李牧來約盟,故歸其質子
[2].史記 秦始皇本紀: 二十六年 初并天下,令丞相、御史曰:「異日韓王納地效璽,請為藩臣,
已而倍約,與趙、魏合從畔秦,故興兵誅之,虜其王。趙王使其相李牧來約盟,故歸其質子。已而倍盟,反我太原,故興兵誅之,得其王。趙公子嘉乃自立為代王,故舉兵擊滅之。
[3].金樓子 興王: 初堯教丹朱棋,以文桑為局,犀象為子: 少昊帝金天氏,一號窮桑. 帝顓頊高陽氏 以水承金, 始都窮桑. 康熙字典桑: 日初出東方湯谷所登 搏桑 叒木也。 《典術》桑箕,星之精。猗彼女桑,荑桑也。蠶月條桑,枝落采其葉也。《呂氏春秋》伊尹生于空桑。又桑林,樂名。《左傳·襄十年》宋公享魯侯于楚丘,請以桑林。又桑扈,鳥名。《左傳·昭十七年》九扈爲九農正。註:桑扈,竊脂。又姓。《姓苑》秦大夫子桑之後,漢桑弘羊、桑楚。又複姓。桑丘、庚桑。𠭨,籀文桑。
Added: October 13th, 2025.
May 21 ·
삼국유사에는 <단군기(壇君記)내용을 인용하여 해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 라고 했다 . 중국기록에는 고구려와 부여의 건국에 나오는 해모수 (解慕漱), 그의 아들 해부루(解夫婁), 그리고 금와(蛙, 蝸)란 이름이 없다 . 한서 지리지와 통전에 나온 개마(蓋馬: 蓋; gài gě hé音合; hé gě) 란 이름을 비교해 보면,부여와 고구려 시조에 나오는 해모수의 해모(解慕) 같은 뜻이 분명하다 . 수(漱)자는 도망을 간 지도자 (澣)란 뜻으로, 현토군에 있던 서개마현의 지도자로 도망갔던 사람이 해모수 (解慕漱)다 . 흑(黑; [hēi] hēi hè/흐어/해) 자 해(解)자가 모두 해(sun, sun-ray)를 사음한 글자(蓋音合)와 같은 사음자다. 고구려와 부여는 현토군에 있는 선비산(鮮卑山)으로 증명된 의무려산 (醫巫閭山)이 있던 곳에서 나타났다. 조양시 동쪽에서 북진시 서쪽에 있는 높은 산이다.
순자정론(荀子正論)에는 난세의 어려움을 다루면서<왕옥산 요새에 숨었던 사람이 어떻게 동쪽에 있는 낙원 땅을 알수 있겠느냐 면서,이를 우물안의 개구리 우화 (坎井之蛙,不可與語東海之樂)로 다루었다. 황하 문명의 발생지에서 요순임금이 양위(堯舜擅讓)를 했다. 그곳을 떠난 부족이 중산국(中山)에서 부유(扶柳)족을 흡수하여 호타하(滹沱河)연안에 제단(擅呼沱)을 쌓았다.
음과 뜻을 뒤섞어 만든 글자로 이름을 지어 같은 여울을 여러 글자로 적었다. 호타(滹沱)란 글자에는 가래침을 밷어 모인 연못이란 뜻도 있다. 그곳을 떠난 지도자를 수유(須臾)라 했다.
[젓가락 숟가락 하는 ”가락“ 이란 어음의 기원이 우리 말입니다. 가야금 가락국 가시리 가시리묵 등등 오늘 한국어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太平廣記 道術二 杜巫: 道士命挲羅。須臾,巫吐痰涎至多,有一塊物如栗。道士取之,甚堅固。道士剖之。若新膠之未乾者。丹在中。道士取以洗之,置於手中,其色綠瑩。巫曰:「將來,吾自收之,暮年服也。」道士不與曰:「長白吾師曰:『杜巫悔服吾丹,今願出之。汝可教之,收藥歸也。』今我奉師之命,欲去其神物,今既去矣,而又擬留至耄年,縱收得,亦不能用也。自宜息心。」遂吞之而去。巫後五十餘年。罄產燒藥,竟不成。出《玄怪錄
오손의 오(烏)자를 음이 같은 “호:呼, 乎,虖, 戶, 胡”자로도 기록 했다 . 호타(滹沱.呼沱)란 뜻은 <호(胡) 저 다른 사람(它)이 사는 땅>을 지나는 여울(沱)이란 뜻으로 예하(濊河)라고도 했다. 산서성에서 나와 천진을 관통하여 발해만으로 빠지는 해하 (海河)의 한 줄기다 .
타(它)자는 시경 홍명(鶴鳴)에 나오는 타산지석(它山之石)이란 타자에 물수변을 더한 글자다. 타(它: 宀:匕)자는 “他, 牠”와 같이 <저들 유목민>이란 뜻으로 해지(解池)연안에 살턴 토착 민을 그린 합성 상형글자다 . 설문에 바다해(海)자를 천지(天池)라 했다 . 산해경 해내경에 실린 천독(天毒)이 살던 곳이란 뜻이다. 광운(廣韻)에는 설문해자에 실린 천지를 설명 했다. 산서성에 있는 단군조선의 발생지인 해지(解池)가 분명하다 . 그 일대에서 치수사업을 총괄 하던 지도자가 실각 했다. 하여 그를 낙백 하백 빙이 “洛伯 河伯 馮夷”라 했다. 그가 동명왕의 먼 시조라 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하백녀랑(河伯女郎)이라 했다.
호타하(滹沱河)는 치수(治水) 성수(聖水)라고도 불렀다. 쌍간하(桑乾河) 영정하(永定河)와 같이 발해만 천진(天津)을 지나는 해하(海河)의 지류다. 그 일대에 맥국 (貊國) 이 있었다.
뽕나무 상(桑)자는 세 지도자가 함께(𠭨,籀文桑)라는 뜻글자다.
May 21, 2018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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