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이 많은 경전 맹자(孟子)
동이 (東夷)와 중국(中國)
추성 (鄒城)가까이 임성任城) 신라 설 (薛)씨
맹자(孟子)의 스승 자사(子思)
맹자의 어머니 추맹가모 ( 鄒孟軻母)
가래나무 추 (楸) 를 추(鄒, 騶)두 글자로.
맹자에 실린 고(顧)자와 혁추(弈秋)
중원에 있던 가라(加羅)의 수도.
21 쪽
서론: 맹자(孟子)란 글자에는 의문이 많이있다. 흔히 부르는 맹자의 본명은 맹가(孟軻)다. 양 (梁; 502~549)나라의 주흥사 (周興嗣 ; 470?~521) 가 지은 천자문에는 맹가(孟軻)라 했다. 그의 업적에 관해 여러 유가들이 가필 증정한 유교경전의 하나를 맹자(孟子)라 한다. 맹자(孟子)는 혼미하게 편술되여 그 참된 뜻을 찾기라 어렵다.
사마천은 이를 맹자서 (孟子書)라 했다. [1] 한나라이전 기록에는 그의 자호 (字號)가 실리지 않았다. 후한 말기의 조기(趙岐, 108년? ~ 201년)가 맹자장구(孟子章句)를 저술하여 였다. 후세에 사서장구 집주의 하나인 맹자 집주(宋明 四書章句集注 孟子集注) 를 만들어 보충 설명되 었다. [2]
맹가(孟軻,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의 이름자는 자여(子輿) 자거 (子車), 자거 (子居), 자전(子展) 등 여럿이 있다. 그의 조부와 부친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는 산동성 추현 (鄒城)에 살았다. 막내동생 계씨 (季氏)가 추억산 가까이 임 (任處守)에 봉해졌다 하여 임씨 (任氏)가 나타났다. [3] 임나가라 (任那加羅)가 그곳에 있었다. [4] 그 곳이 신라 사람으로 한문을 잘 했다는 강수(强首,? ~ 692년)의 고향 임나가량 (任那加良) 이다.
산동선 미산호 동북쪽 옛부터 고조선 영역이었다. 금미달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미산호 (微山湖) 북쪽 태산일대에 살았다. 그들의 고향에서 다양하게 쓰이었던 가래나무 추 (楸)자 를 음차 하여 고을부 또는 말마 변에 추(騶 鄒)자가 나타났다.
秋 가을 추, 밀치 추. 之 갈 지, 行갈 행, 행위 행, 줄 항. 세 글자가 모두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가을 추를 (䆋 가을 추. 秋의 古字, 穐 가을 추. 䆋의 略字, 秌 가을 추. 秋와 同字)등 여러 글자로 썼다.
의문이 많은 주 원인은 언어 소통이 불편 해서 였다. 그가 개적어를 쓰는 금미달에서 내려온 사람들 대화한 내용을 중원 사람들이 옳바로 번역하지 못해서 나타났다.
He was bilingual. His mother tongue was 개적어.
의문이 많은 경전 맹자(孟子)
가래나무 추 (楸)자를 살펴보면 괴방(鬼方) , 즉 상나라 북쪽에 있던 세력과 관계가 있다. 무정이 “부열(傅說)을 얻어 괴방(高宗伐鬼方)을 정벌했다”는 지역, 즉 산마루 서낭당에 이정표를 새워놓은(樹槐,聽訟其下) 방홀산 금미달 그리고 바둑판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귀신 구(鬼)자를; 귀신 머리 형사(象鬼頭)의 약자로 속일 궤(詭)라 했다. [5]
전자 도서관 이라 부르는 (http://ctext.org/zh)에는 맹가(孟軻) 이외 ”魯惠公元妃, 魯昭公 夫人, 齊靈公夫人” 세명을 더해 모두 네(4) 사람이 맹자(孟子)란 이름을 사용했다.
사기 맹자순경 열전(孟子荀卿列傳)는 맹자와 순자 예기는 별로 없고 추(騶)가 들어간 사람들과 산동반도에서 활동 했던 사람들에 관해 기록 했다. 맹자에는 화해의 성인이란 유하혜가 실렸다. 유하혜 (柳下惠)란 유울국 (柳郁國)에서 내려온 혜(惠; 해 sun)란 뜻이다. 동박삭은 유하혜 위 대장추(柳下惠為大長秋)라 했다. 대장추란 [궁정에서 여자들이 사는 곳을 총괄하던 대잔담사(大匠詹事)를 맡아 보던 환관의 우두머리]를 뜻한 글자다. [6] 한고조 유방이 그의 첫아들을 산동성에 봉해 제왕 비(齊王肥)라 한다. 가래나무 추 (楸)자를 대장추의 가을 추(秋)자로 바꾸었다. 가을이란 어음에는 새가 날아 간다은 뜻이 있다.
고전에는 “伯禽於魯. 封周公子伯禽於魯”, 즉 주공을 아들 백금(伯禽, 날짐승의 지도자)을 산동성에 봉헤 노나라가 나타났다. 화해의 성인 유하혜 (柳下惠; 前720年 – 前621年) 가 노(魯)나라 땅에 정착 했다. 그의 동생 도척(盜跖)은 의로운 도적이 되었다. 이들이 모두 금미달에서 내려온 고조선 사람들이다.
맹가(孟軻,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 이후 제자백가 중 음양가(陰陽家)의 대표적인 추연(鄒衍, 騶衍: 기원전 305~240)또한 북쪽 금미달에서 내려 왔다. [7] 그와 백규 단 (白圭) 이 섬기던 위혜왕 (魏惠王, 기원전 400년 ~ 기원전 334년)의 선조들(北方之學者)은 모두 호걸지사 (豪傑之士)였다. 금미달 사람들은 (子之兄弟) 수십 년 동안 모셨던(事之數十年) 스승이 죽고(師死而) 나서 마침내(遂) 선조들의 위업을 배반(倍之) 했다. 금미달에 있던 고조선의 몰락을 이렇게 은미하게 기록 했다.
맹자서(孟子書)와 사마천의 사기에는 고조선 영역에 자리잡은 서주의 역사를 설명 했다. 옛 선조부터 사관을 지냇던 사마씨 가문에 전해 오던 기록을 종합해서 편술한 사기에 “하상은주”시대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당연한 처사다. 맹자(孟子)에 처음으로 “순임금이 황하 동쪽에 산다 하여 동이 (東夷)라 했고, 문왕이 기산 밑에 사다 (文王生於岐周)하여 서이(西夷)란 뜻을 설명 했다. 중국(中國)이란 이름을 처음 사용 했고 거리가 천여리라 했다. [8] 맹가(孟軻)는 누구로 부터 옛적 예기를 들어 기록 했을까? 맹자(孟子)의 스승은 혼미하고 맹자의 부친은 알려진바 없다. 맹자의 스승으로 알려진 자사 세 사람이 있다.
노목공이 맹자의 스승으로 알려진 공구 자 자사(孔伋, 字子思; 前483年-前402年) 에게 도란 무었이냐고 물었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 제자 중에 자사(子思) 가 셋이다. 공자의 손자가 자사 급(孔子生伯魚鯉,鯉生子思伋)이다. 송나라 자사(宋人, 字子思)는 공자 보다 36년 밑이다. 또한 사람은 금미달이 있던 연(燕)나라에서 내려온 사람 자사(燕伋,字子思)로 나이는 밝혀지지 않았다.
맹자의 어머니가 그의 스승이었다. 유향의 열여전 모의(列女傳 母儀)편에 맹자의 어머니(鄒孟軻母)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녀가 아들의 옳바른 교육을 위해 이사를 다녔다는 뜻에 “맹모 삼천지교 (三遷之敎)”란 성어가 나타났다.
맹자의 어머니가 추(鄒孟軻母)에 정착
산동성 노나라 사람들을 번인(魯國蕃人)이라 했다. 한서 지리지에 “魯國蕃 《註》邾國也” 라고 실렸다. [9] 맹자의 고향(騶本邾國)을 번(蕃: 艹,下:番 foreign things.)인, 즉 북쪽에서 내려온 미개한 사람들이 잡초가 무성한 곳(草茂)에 살았었다.
맹자 (孟子, 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 의 어머니 추맹가모(鄒孟軻母) 가 정착 하던 시절에 노목공(鲁穆公;?— 기원전 377년)이 주(邾; 朱, 阝/邑)란 곳을 추(騶)자로 바꾸었다. 맹자의 막내동생이 정착한 곳이 산동성 미산호 북쪽이었다. 임나가라 (任那加羅)가 그곳에 있었다. [10] 스스로 임나가량 (任那加良)인이 라한 강수의 본향이다.
바둑 놀이를 했다는 단과 단주(丹, 丹朱)가 실렸다. 그에 관한 기록을 주의 깊히 읽어 보면 “단과 단주(丹, 丹朱)은 단군을 뜻했다. 흔히들 단지치수(丹之治水也愈於禹)의 단자를 양혜왕의 제상 백규 (白圭 丹)로 풀이 한다. 그 당시에 홍수는 없었다. 치수(治水)란 글자는 다스리다 (govern) 는 뜻으로 풀이 하면 그의 통치 방법이 우왕(帝禹)보다, 또 그가 섬기던 양혜왕, 즉 위 혜왕(魏 惠王, 기원전 400년 ~ 기원전 334년)보다 우수하다고 자칭한 꼴이 돤다. 이를 잘못 풀이하여 백규 (白圭 )를 중국 상인의 비조, 또는 치생 (治生)의 비조 (鼻祖), 상신 (商神)으로 모시고 있다. 그가 모시던 양혜왕을 중국에서는 수유(須臾), 한국에서는 “용이 되지 못한 큰 그렁이”란 뜻의 이무기 (螭龍 또는 螭蛇)로 기록 한다.
단지치수(丹之治水)의 단은 “태원 일대 분하계곡에서 홍수(洪水, 洚水)방지 사업을 지도 하던 단군왕검 이전의 지도자 단군(shaman king)을 뜻했다.
우(禹)의 추종자가 반란을 이르켜 싸원던 결정적인 승부 또는 치수 (治水)사업과 같은 중대한 사업 계회을 바둑놀이로 표현 했다. [11] 혁혁 양산 (奕奕 梁山)의 혁자는 같은 두 글자가 아니라 클 혁 바둑혁 (奕弈)이 옳은 글자다. 위대한 동이 수령 백익이 최후 승부를 다투었던 곳이 양산이였다. 그 곳을 대전우감(大戰于甘), 대목지야大穆之野 라고 했다.
산동반도에 나타난 추(鄒자는 같은 고조선 영역이었던 금미달 가래나무 골(楸) 즉 가야국 (加耶國) 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라고 본다. 양자방언에 실린 조선이란 글자의 영역에 가래나무 추(楸)자를 귀신 나무(괴 槐)라 했다. 나무 잎이 불(火)같이 변한 계절, 가을 추자는 괴단나무에 붙은 불(秋取槐檀之火)이란 뜻을 취한 글자라 한다. 가래나무 추 (楸)자를 사음한 추(鄒城)자가 산동성에 나타났다. 중산국(中山)이 있던 곳에 가래나무 가문(楸戸)에서 가첩을 저술했었다. 그들이 고난(苦楸)을 겪었다. 그곳에서 추평(楸枰) 바둑판 기국(棊局)이 나타났다. [12] 추(楸, 千樹萩)자의 출원지를 상산읍 , 남쪽 하제지간 (常山巴南河濟之閒)이라 했다. 전국책에 나오는 상산 갈석이 있는 금미달을 뜻한 지역에서 천수추(千樹萩)가 고난을 당했다하여 고추(苦楸), 즉 수유(須臾) 의 근간이 되는 글자 유(楰: 木,右:臾 yú)가 나타났다. 산동성에 있던 전유국을 맹자에 실린 계씨(季任 季氏宰) 가 (季氏將伐顓臾) 정벌 했다. 귀신 나무(槐 懷 鬼)란 뜻으로 장승을 뜻했다.
가래나무골 사람들이 큰 삽에 줄을 묶어 세 사람이 같이 흙을 옮기던 농기구를 가래라 했다. 가래(鍬shovel)를 이용하여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해자(垓字/垓子) 를 만든 곳에서 여러 글자로 기록하는 가야 (伽倻, 加耶), 가라 (加羅), 가락 (駕洛), 가라 (加良) 여러 나라가 나타났다. 그들이 그곳 특산 가래나무로 바둑판을 만들어 사용 했다.
해자(垓字/垓子)란 해(sun)을 숭상하던 사람(解, 奚)들이 평지에 만든 요새를 뜻한다. [13]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 지역을 흐르는 여울을 호타하 (滹沱河), 치수 (治水), 상간하 (桑乾河) 역수 등등 여러 글자로 실렸다. 상간 (桑乾) 이란 “유목민 지도자 (木)를 돕는 세 보좌관”이란 뜻이다. 그 지역을 소제로 읊은 시문 상호지습( 桑扈之什)에 변한 (弁韓) 지도자가 쓰던 관을 규변(頍弁)이라 했다. 여러글자로 적는 변한 (弁韓)의 후예가 음이 비슷한 여러 글자로 적은 변씨(卞氏), 반씨(潘氏, 班氏), 번씨(樊氏)가 나타났다.
시설에는 규변을 연나라 왕족의 혈통에 관한 시문(此燕王族之詩)이지만, 그에는 비유적인 문구도 있다 (賦中有比也)고 평했다. 연도(燕都), 즉 위(魏) 나라로 기록된 고조선 수도에 도술인이 불상을 싣고 왔다는 태평광기의 설명과 일치한다. 전국시대 여러 나라가 싸웠던 연도(再圍燕都)를 남쪽나라(廣韻)에서는 거란족의 수도(𨜒:燕都)이라 했다.금미달에서 산동반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 진한 혼란기에는 고조선 영역이었다. 그곳에 조선을 오팽이 멸(彭吳賈滅朝鮮)하고 창해군을 세웠다.
이는 후에 사기( 史記) 조선열전( 朝鮮列傳에서 창해군과 함께 다루기로 한다.
추성 (鄒城)가까이 임성任城) 신라 설 (薛)씨
추기(鄒忌)가 전국시대(戰國時代) 제위왕(齊威王) 의 국상國相이 되여 그를 성후(成侯)로 봉했다. 산동성에 있던 신라는 초기에 설 (薛)씨가 왕이 되었다. 산동성 설(薛)의 기원은 셋으로 해중 (奚仲) 의 후예, 질간씨를 설씨로 바꾸었고(叱干氏攺爲薛), 마지막 하나는 금미달 요서 설씨(遼西薛氏) 라 했다. 금미달 사람들이 산동성에 내려와 살았다는 증거다.
여러 글자로 기록된 가야 (伽耶)는 금미달에서 현악기 가야금을 쓰던 사람들이 산동성 으로 옮겨왔다는 증거가 있다. [14] 떠나 “가야”지 하는 어음이 가야의 어원이다.
한소후 원년 (韓昭侯元年)에 진시 황의 선조 진나라가 한나라의 서산(秦敗我西山)을 빼았었다고 십육국연표에 실렸다. 제齊나라 중신重臣 추기가 가야금으로 왕을 사로잡아 성후(鄒忌為成侯)로 책봉 되었다. 금미달 가야국 전통 현악기가 산동성에 소개 되었다.
위혜왕을 양혜왕 수유 등등 여러 이름으로 기록 했다. 그의 업적을 찬양란 이름이 상앙 (商鞅, 기원전 390년 ~ 기원전 338년)이다. 상앙을 위앙(衛鞅)이라 고도 불렀다.
이렇게 혼미하게 기록된 금미달의 많은 문물과 인제가 산동성으로 내려왔다.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는 미추이사금 (味鄒泥師今, ? ~ 284년, 재위: 262년 ~ 284년)이, 백제 온조왕의 형이 미추홀(彌鄒忽) 에 수도를 정하여 대륙백제가 나타났다. 고구려 동명성왕 ( 東明王 高名朱蒙) 추몽 단군지자 (鄒蒙壇君之子)라 했다. 필자는 동명왕 (東明王) 이 호타하 상간하 또는 역수라고 부르는 여울이 흐르는 산서성 대현 오대산 유역 북부여 (北夫餘)에서 떠나 발해만 서쪽 동부여 (東夫餘), 즉 오늘의 천진 일대에 이르렀다. 금미달에 세유목민 지도자가 살았다 하여 그 지역을 흐르는 여울을 쌍건하 (桑乾河)라 했다. 한 부류가 해안으로 내려 왔다. 이들이 발해만 연안에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삼국사기 신라 초기에 낙랑(樂浪) 말갈 (靺鞨) 가야(加耶)이 실렸고, 당시 제일 나이많은 금관국 수로왕 (金官國首露王年老)이 실렸다. 금관을 쓴 사람들이 떠나 가는 현상을 추금행지시(秋:金行之時)라 했다. 가을 추(秋 䆋 音蒭)자의 변천과 용도가 다양 하다.
동명왕( 東明王) 이 북부여를 떠나 동부여의 왕이 되었다. 그를 따라 고조선 사람들이 해안으로 내려 왔다. 사기와 한서에는 동명왕이 없다. 동이예군남여(東夷薉君南閭)가 많은 사람들을 대리고 내려와 산동성에 창해군이 생겼다. 금미달을 떠나 “높히 (위, 우) 때를 지어 날아 가는(go行 去) 큰 새 (a large bird)를, 기러기, 거위, 새 을(乙)로”도 기록 했다. 바둑 (圍棋 囲棋, 行く, go, departure)돌을 놓는 방법을 행마법(行馬法)라 한다.
바둑판을 추평(楸枰)이라 했다. 중산(국)에는 가래나무 집안 (楸戸)이 있었다. 그들은 가래집안에 관한 (가승보)를 저술을 했다. 이를 [중산국에 추호(中山又有楸戸)라는 저명한 작가(著名楸籍者也)가 있었다]고 기록 했다. 단성식(段成式)이 바둑을 관람하며 읊은 시문에는 혁추경 일호 (奕楸傾一壷)란 문구가 있고, 심참의 시에는정리교연 측 국추 (井里交連側局楸) 라 했다. [15]
가래나무 추자는 [중산국이 있던 금미달에서 저명한 집안을 뜻했다. 그들이 바둑을 즐겼고, 가문에 관해 많은 글을 남겼다]는 뜻이 은유적으로 실려 있다. 그들이 산동 반도로 내려와 방언에는 “바둑을 혁 옆용(奕: 偞容也)이라 , 즉 떠러진 낙옆 같은 용모”라 했다. [16]
시경 한혁에 실린 혁혁(奕奕) 양산(梁山) 의 혁(奕)자를 [이기씨가 전쟁에서 실패 했다는 사실을 바둑에 비유해서 설명] 했다. 같은 글자를 한국에서는 “혁”, 중국에서는 “이”라 읽는다. 글자 설명에 혁(奕) 이익절(夷益切) 음역(音亦) 대야(大也)라 했다. 이를 의역하면
중국에서 이 (伊李)라고 읽는 혁(奕) 자는 동이수령 백익을 뜻한 글자다. 일어로는 혁혁 (奕奕)일 “애끼애끼”라고 읽는다. 애처롭다는 뜻인듯 하다.
맹자(孟子)의 스승 자사(子思)
사서에는 자사(子思)란 이름이 여럿 나온다. 한글 위키에 이르기를; “자사(子思, 기원전 483년? ~ 기원전 402년?)는 노나라(魯)의 유학자이다. ‘자사’는 자이며, 성씨는 공(孔), 이름은 급(伋)이다. 공자의 손자이자, 공리(孔鯉)의 외아들이다. 할아버지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제자가 되어, 유교의 학맥을 이어갔다. 보통 자사와 그의 학파에서 나온 맹자의 학맥을 유학의 정통 노선으로 간주한다.” 라고 실렸다.
묵자한고 비유하(非儒下)에는 공급 자 자사(孔伋 字子思), 동곽 자사 (東郭子思)란 이름이 실렸다. 이에 관한 설명이 분분 했다. 그를 공자의 손자라고 했다. [17]
사마천은 공자가어에 보이지 않는 원헌자 자사(原憲字子思)가 실렸다. 고사전에는 원헌자 자사 송인 공자의제자(宋人也,孔子弟子)라 했다. 당현종이 그를 원백(原伯)으로 송나라 진종(宋真宗)은 그를 임성후(任城侯)에 봉했다. [18] 임성(任城)은 임나가라(任那加羅) 수도를 뜻한 글자라고 본다.
맹자의 어머니 추맹가모 ( 鄒孟軻母)
한나라때 유향 (劉向, 기원전 77년 ~ 기원전 6년)이 편술한 열녀전 (列女傳 ) 추맹가모 ( 鄒孟軻母)에 의모(母儀)에 올렸다. 홀어머니 장 (仉; “zhǎng)씨 밑에서 교육을 받아 맹모삼천 지교 (孟母三遷之敎) 라는 문구가 있다. 그에 실린 내용이 자녀교육의 기반을 만들었다. 맹자의 부친과 형제에 관한 뚜렷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천한 사람들, 또는 노예라고 하던 고조선 사람들(濊 貊, 斯 )이 중원에 흐터져 살았다. 맹자에는 그가 만났던 위혜왕(魏惠王)의 대신이었던 백규(白圭, 名丹)에게 자지도(子之道) 는 맥도야 (貉道也) 라고 했다. 대화내용을 설명 하면 아래와 같다. [19]
지금 중국에 사는 (今居中國) 유목민 너희들 예맥(貉)족은 옛적 부터 하나라 폭군 (夏王桀) 의 주구(走狗)로 살아왔다는 뜻이 있다
부국 강병책을 계획 하던 양혜왕과 대신 백규(白圭)가 중국에 살던 예맥족이란 뜻이다. 공자가 숙신씨의 활에 맞은 새매를 산동성에 있던 진나라 궁정에 보았다. 순임금에게 활을 선물 했던 숙신씨를 예맥, 말갈 등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남용(南容)이 세번이나 예기 했다, 공자의 조카딸이 백규의 아내라고 논어에 실렸다. 논어에는 사마천의 조부 사마희가 중산국 제상이라고 했다.
시경 탕지습 앙(蕩之什 抑) 편에 “백규지점 은 상가마야(白圭之玷、尚可磨也), 진언지점은 불가위지 (斯言之玷、不可為也)라, 즉 힌옥에 흠은 갈아 지울수 있지만, 말(斯言)을 한번 잘못하면 지울수 었다”는 위나라의 제상 백규를 비유한 문구가 있다.
시경 소남에 실린 추우(騶虞) 란 글자를 시설에서는마을이란 뜻이 있는 글자로 바꾸어 추우(鄒虞)라 했고, 양혜왕의 대신 백규(白圭)를 구슬옥 변 백규(白珪)로 쓰기도 했다. [20]
이렇게 중원사람들은 고조선에 관한 사연을 기묘하게 시록 했다.
가래나무 추 (楸) 를 추(鄒, 騶)두 글자로.
추(鄒, 騶)두 글자는 동기와 결과를 품고 있다. 말마 변에 추(騶)자는 “말 탄 사람” 이란 뜻이 있고 고을 부(阝 邑 阜)변에 추(鄒) 자는 그가 정착한 곳”이란 뜻이다. 삼국사기여러 곳에 미추홀 미추왕 등등 추(鄒) 자가 나오고 광개토대왕 비문에 ‘시조 추모왕 (始祖鄒牟王) 이라고 각인 되었다. 삼한의 선조가 모두 금미달 가래나무 추 (楸) 고을에서 왔다는 증거다.
추맹가( 鄒孟軻)란 글자를 보면 “가래나무골을 지나다 목적지에 (이르기전에 예정일 보다 일찍? 孟)수래에서 태아난 사람이라” 는 뜻이다.
여러사람들이 모여든다는 뜻에 모일 취(聚)와 음이 가타고 설명하는 나라 이름 추(鄒, 騶) 자는 가래나무 추( 楸 榟) 자를 가차한 글자다. 즉 임신부가 마차를 타고 가야국 유랑민이 사는 곳에 추( 鄒)에 이르기 전에 출산하여 추맹가( 鄒孟軻)라고 불렀다.
맹자의 어머니 장 (仉)씨
북송시대 편술된 광운(廣韻)에는 맹자의 어머니를 장(仉: surname of the mother of Mencius)씨라 한다. [21] 제사에 쓰는 기구(几 )를 지니고 있던 사람이란 뜻 글자다. 양공자 장(梁公子仉䁈 zhǎng qì 後)씨의 후예라 했다. 맹자 어머니를 뜻한 장 (仉; “zhǎng; 亻,右:几 small table)자는 풀이가 혼미하다. 강희자전에는 옥편에 실린 내용을 인용하여 장(几)자 를 책상 안 책상 괘(案 机)라 했다. 맹자 어머니 장 (仉)씨는 중요한 책상을 관리 하던 집안 사람이란 뜻이 있다. 앞서 풀이한 “궁산국 (中山)이 있던 추호(楸戸)에서 추평 (楸枰) 기국(棊局)이 나타났다”는 기록과 일치 한다.
맹자의 어머니 장 (仉)씨는 영괘(靈几) 같은 진귀한 물건을 관장하던 집안 사람이란 뜻글자다. 그녀는 금미달 가래나무 골 집안(楸戸)사람이다.
열여전 의모의 첫째로 유우씨 두 부인(有虞二妃)을 올렸다. 첫 부인의 큰아들이 아황 (長娥皇)이라 했다. 그의 가승보를 추우 (騶虞) 길황지승(吉皇之乘) 이라했다. 그에 관한 기록을 상서 우서(虞書)라 했다. 맹모는 추우 (騶虞)의 후손, 즉 단군조선의 주도권을 이어가던 가야국의 공주였다.
맹자와 사기 조세가에 계임(季任)이란 글자가 실렸다. 추맹가( 鄒孟軻)와 그의 막네 동생 (季任)은 조나라 영역이었던 금미달에 있던 가야국의 후손이라고 추리된다.
광개토대왕이 사기에 나오는 발해만 서쪽 양평(襄平)을 지나 왜인이 창궐하던 곳을 정절 했던 곳에 임나 가라 (任那加羅)가 있었다. 그곳이 강수가 임나가량인(任那加良)이라한 그의 본향이다. [22]
맹자의 어머니는 청구 (靑丘)라고 부르던 금미달 지역 (雁門, 代郡, 上谷)에서 내려왔다. 사마천 (司馬遷)의 선조는 중산국 제상을 지니다 소량 (小梁)으로 내려왔다.
붉을 단 푸를청 (靑)자를 달월 푸를청(青)자로 바꾸어 산동반도를 청주”齊曰青州” 라 한다. 남북조 시대 남조 역사서에는 금미달에서 내려온 부여씨의 후손들이 세운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倭·新羅·任那·加羅· 秦韓· 慕韓)이 실렸다. 한해의 동쪽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있다. 사학계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뚜렷하게 설명을 못하고 있다.
중원 동해안으로 내려 갔던 삼한의 후예가 강남에서 동남아 멀리 여러 해안에 정착 했다. 진서와 책부원귀에 [금미달에서 떠난 사람들이 남중국 해안 4000 여리에 걸쳐 신미제국 (新彌諸國) 20여국을 이루고 살았다]고 했다. 이를 송서등 남조 역사서에는 왜 백제 신라 임나가라 진한 변한 “倭百濟 新羅 任那加羅 秦韓慕韓” 일곱 나라는 왜왕이 다스렸다고 했다. 이들이 동남아 해안을지나 스리랑카에 까지 이르러 그 곳에 번성 했던 남방불교, 즉 미륵신앙 (彌勒信仰)을 강남에 전했다. 대만섬을 거처 한해를 건너 한반도에 이르렀다. 대만섬(Formosa)에는 “가라산 가라호 아리산”이 있다. [23] 제 4장 원시 불교에서 밝혔다.
양나라 역사서(梁書)에 맹자 양혜왕(梁惠王)편에 실린 돌아볼고(顧)자가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고향을 떠났으니 후회하지 말라]는 뜻이 많이 실렸다.
고야왕(顧野王)이 옥편을 만들었다. 비슷한 어음이 삼국지 (三國志)위서 동이전 (魏書 東夷傳)에 변진구야국 (弁辰狗耶國), 구야한국 (狗耶韓國)으로 기록되었다. 고야와 구야는 가야의 와전된 어음이라 본다. 가야는 오랫적부터 한반도에 정착 했다.
일본 와카야마현(和歌山県)에 현재는 단상가람(壇上伽藍)으로 불리는 고야산( 高野山이 있다.
양(梁, 502년 ~ 557년) 나라 초기에 주흥사(周興嗣)가 천자문을 만들었다. 후경의 난 (548년~552년) 이 발생하여 남방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부여(扶餘)씨의 대륙백제 수도 거발성을 점령하고 문서를 불살랐다. 그때 백제 성왕 (聖王, 504?~554년)이 전사하고 뒤를 이은 아들이 위덕왕(威德王, 525년 ~ 598년)이다. [24]
성왕 (聖王)이란 불교에서 칭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 을 간략한 칭호라 한다. 전륜(轉輪) 이란 길황지승 (吉皇之乗)과 같은 회전(Revolving)한다, 또는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갔다 는 뜻이다. 즉 같은 가문에서 단군으란 직책을 이어 갔다는 뜻을 불가에서 잘못 풀이 했다.
백제 위덕왕 17년에 대륙에 남아 대륙백제의 전통을 이어가던 고제 후주 (高齊後主) 가 사절단을 보내면서 배왕(拜王)이라 했다. 북제서에는 후주를 어린왕이라 유주(幼主)라 했다. 그때가 남북조 시대의 말기다. 대륙에 있던 백제 신라 임나 가야 왜가 모두 바다를 건너 한해 동쪽으로 옮겨 오던 시절이다. 그때 신라에서 울릉도를 정벌 했다
수(隋, 581년 -)나라가 중원을 정벌하고 최후로 남쪽 광동성에 있던 진(陳)나라를 정벌 하러 가던 전함이 탐모라국 (耽牟羅國), 즉 대만섬(Formosa)에 표류되여 백제를 통해 돌려 보냈다.[25] 금미달(今彌達)에서 발해만으로 내려와 여러 소읍 국가를 세웠다, 점차로 한해의 동서 연안을 따라 해안으로 흐터 졌었다[는 사실을 멀라 이러한 잘못이 나타났다.
양나라서 바둑이 (雲公善弈棋, 善琴棋)성했다.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목화자단기국 (木畵紫檀碁局)을 백제에서 선물 했다고 한다. 백제 성왕이 보낸 선물이라 본다.
맹자에 실린 고(顧)자와 혁추(弈秋)
양혜왕(梁惠王, 魏侯罃 魏惠王; 前400年 – 前319年)이 금미달에서 내려와 대량(大梁)에 도읍하여 양혜왕(梁惠王) 이라 했다. 위사(魏斯), 즉 위 문후 (魏 文侯, 魏斯? ~ 기원전 396년)가 산서성에 흐터져 살던 고조선 사람들을 모아 위나라 (魏)을 세운 초대 제후 (재위 : 기원전 445년 ~ 기원전 396년)이다. 그 아들 위 무후 (魏武侯, 재위 : 기원전 395년 ~ 기원전 370년)가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마지막 단군이다.
맹자와 양혜왕(梁惠王의 대화에 “되돌라볼 고/구顧, 향원鄉原”란 글자가 실렸다. 향원 (鄉原)이란 고향을 뜻한 글자로 금미달 가야국이 있던 곳을 뜻했다. 고향을 덕지적 (德之賊)이라 했다. 그곳에 남아있던 가야 사람들을 엄연미 언세자(閹然媚於世也者)라, 즉 환관처럼 세상에 아첨하는 자들” 이라 했다. 금미달에 원시 불교가 들어와 지도층이 었던 가야 사람들이 불가에 입적 했다 하여 대장추 (大長秋), 즉 환관에 비유 했다. [26]
그때 그곳에서 미륵((彌勒), 안왕(雁王) 안문관(雁門關)이란 글자가 나타났다.
맹자가 살던 당시 혁추(弈秋)라는 국수가 있었다. 바둑기사 설명에 금부혁지(今夫弈之)와 홍곡장지(鴻鵠將至)란 표현이 실렸다. 두 사람을 놓고 바둑에 관한 설명을 했더니 한 사람은 잘 듣고, 다른 한사람은 고향 생각만 하고 있드는 뜻이다.
그당시 산동성에 바둑이 성행 했다는 뜻이다.
홍곡(鴻鵠)이란 안문관이 있는 금미달을 떠나 남쪽으로 네려온 기러기란 뜻이다. 양나라때 고야왕( 顧野王)이 옥편(玉篇) 을 만들었다. 그 시절에 후경이 (侯景寇亂) 대륙백제 수도 거발성 (居拔城)을 분탕질 하여 문집이 모두 망실 (文集並亡逸) 되었다. [27] 필자는 가야 ( 加耶, 加羅) 왕을 고야왕이라 했다고 논증했다. 중원에 있던 임나가라 (任那加羅)의 수도가 오늘의 강소성 소주시(江蘇省蘇州市)라 했다.
고야왕 (顧野王; 519年 – 581年)의 이름이 희빙 (字希馮)이라 한다. 권좌에서 밀려난 동이수령 백익을 하백 또는 빙리 (馮馮夷)라 했다. 그의 후손들이 발해만으로 내려와 산동반도에서 해안을 따라 동서로 흐터져 나갔다. 만주 해안에 살던 노인들오 부터 들은 예기를 근거로 한반도와 구주열도에 관해 기록 했다. 반도에는 불당 비슷한 소도(蘇塗)가 있고, 서쪽 섬(강화도 州胡)에 사는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중국과 무역을 했다는 내용을 남겼다. [28] 강화도 첨성단이 있었다고 본다. 바둑을 뜻한 글자가 동이전에는 없다. 바둑을 뜻한 기(棋)자는 보이지 않고, 박혁(博弈)이란 글자가 위 촉 오세 나라에 모두 나타났다.
중원에 있던 가라(加羅)의 수도.
중원에 임나 가라가 있었다. 양나라의 고야왕이 살던 곳이 가야의 수도 였다. 맹모의 성 장(仉)는 양공자 장 계(梁公子 仉䁈)의 후손이라 했다.
廣韻 -> 上聲 -> 養 -> 掌: 仉: 姓梁公子仉䁈(𠀤音契)後也.
연나라 수도(𨜒:燕都)에 살던 글안의 선조들이 내려와 양나라 땅에고 살았다.
고야( 顧野)와 어음이 비슷한 구야한국(狗邪韓國)이 왜인전에 실렸고, 산동반도 서북부를 뜻한 변진전(弁辰傳)에는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이 실렸다. [29]
금미달을 떠나 산동반도에 정착 했던 부여씨의 후손들이 해안을 따라 동남아로 진출하던 통로에서 고야왕( 顧野王)이 북쪽 사람들이 옥돌에 글자를 새겨 놓았던 조각을 모아 만든 사전이 옥편이다. 한국에 처음 나타난 “운회옥편 (韻會玉篇)은1536년 최세진이 중국 송나라 황공소의 《고금운회》를 수정하여 편찬한 책”이라 한다.
고야왕( 顧野王)이 만든 옥편에는 바둑(圍棊,博弈) 이란 글자의 변천을 “주문籀文,고문 古文”에 실렸던 글자를 설명 했다. [30] 바둑이 주 선왕에 중산보(仲山甫)로 알려진 태사 주가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문자(斯文)를 만든 금석문에 실렸다는 뜻이다. 혁자와 모양이 비슷한 글자(弃(亠,弁) )는 버릴기(棄)에서 왔다. 변한 양반이 갓을 버렸다는 뜻글자라 했다. 위기 라고도 읽는 바둑(圍棊,博弈)의 기원은 삼한의 시원지인 금미달에서 나타났다.
본향이 금미달인 고야왕( 顧野王)이 옥편(玉篇)을 만들 때에 천자문이 나타났다. 천자문에는 상고사가 많이 실렸고 음독에는 [삼한 (三韓)의 한을 나라한이라 읽고, 일본어로 바둑을 뜻한 행(行)자를 다닐행이라 읽었다. 그에서 “ 街거리 가, 衍넘칠 연 넓을 연” 의 글자가 나타났다.
추연(鄒衍/騶衍: 기원전 305~240)이란 가래나무 골(楸)을 떠난 사람이란 뜻이 있다.
한혁의 혁혁양산 (奕奕梁山) 유우순지(維禹甸之) 란 뜻은 이기씨가 최선을 다해 씩씩하게 싸우던 양산 일대는 승자인 우가 다스리던 곳이 되었다는 뜻이다. 바둑 결승전에서와 같이 최선을 다해 싸우다 젔다는 뜻이다. 성을 열심히 쌓았다는 뜻도 있는 문구다. 하여고구려 성의 특징은 산마루에 돌을 미처 다듬지 못하고 자연석으로 쌓은 흔적이 보인다.
고야왕의 고야와 음이 같은 구야한국이 삼국지 왜인전에 실렸다. 금미달에 나타난 북부여의 후손들이 대륙으로 만주로 한해의 동서연안을 따라 흐처져 나갔다.
결론: 제 나라에는 세 추씨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맹자의 어머니와 같이 금미달 (今彌達) 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다. 그 일대에 온조왕의 형 비류(沸流, ?~기원전 18년)가 정착한 미추홀 (彌鄒忽)이 있었다. [31] 맹자의 어머니를 추맹가모(鄒孟軻母)라 했다.
맹자의 스승 한 사람을 자사(子思)라 했다. 공자의 제자에 연급 자사(燕伋,字子思)가 있다.유교경전 중용 (中庸)의 저자로 알려진 자사(子思, 기원전 483년? ~ 기원전 402년?) 는 노나라(魯)의 유학자라 한다. [32] 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백어(伯魚)가 급(伋, 汲)을 낳으니 그가 자사 (子思)라 했다. 급(伋; deceptive)자에는 “빨리 빨리 란 뜻의 옛적 한국어” 사음자다. 급(伋, 汲)자는 백익이 우물을 만들어 마을(井里汲水)이 생겼다는 고을 사람을 뜻한 글자다. 고사전에 주야급급(晝夜汲汲)이라, 즉 “밤낮없이 바삐”란 어휘가 있다. 급급 발발 속(汲汲, 劫劫,速) 모두 같은 뜻을 의미한 글자다. 급총죽간(汲冢竹簡)의 급총이란 급하게 만든 무덤이란 뜻이다.
금미달의 중심부 화씨벽이 나온곳 정리(和之璧,井里之厥也)에 가야국이 있었다. 맹자의 어머니 장 (仉)씨는 가야국 공주 였다.
끝
[1]. 史記 孟子荀卿列傳: 太史公曰:余讀孟子書,至梁惠王問「何以利吾國」, 未嘗不廢書而嘆也. 檢索條件「孟子」在CTP辭典中有相關的項目
[2].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맹자[유교경전번역총서 2]
[3]. 史記 孟子荀卿列傳 : 孟軻,騶人也。受業子思之門人。道既通,游事齊宣王,宣王不能用。 適梁,梁惠王不果所言,則見以為迂遠而闊於事情。當是之時,秦用商君,富國彊兵;楚、魏用吳起,戰勝弱敵;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而諸侯東面朝齊。天下方務於合從連衡,以攻伐為賢,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是以所如者不合。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述仲尼之意,作孟子七篇。其後有騶子之屬。齊有三騶子。其前騶忌,以鼓琴干威王,因及國政,封為成侯而受相印,先孟子. 列女傳 : –母儀 -> 鄒孟軻母,自由的百科全书 .
[4]. 孟子 告子下:孟子居鄒,季任為任處守,以幣交,受之而不報。處於平陸,儲子為相, 以幣交, 受之而不報。他日由鄒之任,見季子;由平陸之齊,不見儲子。屋廬子喜曰: 「連得閒矣。」問曰: 「夫子之任見季子,之齊不見儲子,為其為相與?」. 屋廬子悅。或問之。屋廬子曰: 「季子不得之鄒, 儲子得之平陸。」 .
[5]. 康熙字典: 楸:《唐韻》 𠀤音秋。《說文》梓也。《韻會》楸與梓本同末異。《爾雅·釋木》槐,大而皵,楸。 小而皵,榎。則楸又槐屬也。《埤雅》楸梧早脫,故楸謂之秋。楸,美木也。一作萩。《史記·貨殖傳》淮北常山巴南河濟之閒,千樹萩,其人與千戸侯等。《述異記》越人多橘柚園,歲出橘稅,謂之橙橘戸。中山又有楸戸,著名楸籍者也。《曹植·名都篇》走馬長楸閒。又苦楸。《詩·北山有楰疏》其樹葉木理如楸,山楸之異者,今人謂之苦楸是也。又楸枰,棊局也。《段成式·觀棊詩》閒對奕楸傾一壷。《沈彬詩》井里交連側局楸。
槐:《唐韻》,𠀤音懷。《註》槐之言懷也。懷來遠人於此,欲與之謀。 《爾雅·釋木》 櫰槐, 大葉而黑,守宮槐葉晝聶宵炕。又《周禮·夏官·司爟註》秋取槐檀之火。又槐里(犬丘)。《前漢·地理志》屬右扶風。《春秋元命苞》樹槐,聽訟其下。鬼:《說文》人所歸爲鬼。象鬼頭。《爾雅·釋訓》鬼之爲言歸也。 《詩·小雅》爲鬼爲蜮。《禮·禮運》列於鬼神。《註》鬼者精魂所歸。《易·旣濟》高宗伐鬼方。黃帝得寶鼎.
[6]. 前漢紀 孝惠皇帝紀: 齊王肥薨。諡悼惠王.景帝更名大匠詹事。掌后太子家令。景帝更名長信少府。 武帝更名長樂少府。將作官。與詹事同。并職。景帝更名大長秋。成帝省詹事。并大長秋典。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전 왕이 마지막 단군이다. « Lee Mosol’s Book Collection
[7]. 孟子 滕文公上: 吾聞用夏變夷者,未聞變於夷者也。陳良,楚產也。悅周公、仲尼之道,北學於 中國。北方之學者,未能或之先也。彼所謂豪傑之士也。子之兄弟事之數十年,師死而遂倍之。
[8]. 孟子 離婁下: 孟子曰:「舜生於諸馮,遷於負夏,卒於鳴條,東夷之人也。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西夷之人也。地之相去也,千有餘里;世之相後也,千有餘歲。得志行乎中國,
[9]. 康熙字典 : 蕃:《說文》草茂也。《詩·唐風》椒聊之實,蕃衍盈升。《書·洪範》庶草蕃廡。《傳》蕃,滋也。又《周語》民之蕃庶,于是乎生。《註》蕃,息也。又草名。《山海經》隂山,其草多茆蕃。又鳥名。《山海經》𣵠光山,其鳥多蕃,或云卽鴞。又方煩切,音樊。義同。又與藩通。《詩·大雅》四國于蕃。又《周禮·地官·大司徒》九曰蕃樂。《註》閉藏樂器而不作也。又《韻補》方愔切,音汾。柳宗元文:我姓蟬嫣,由古而蕃。聯事尚書,十有八人。又《集韻》蒲麋切,音皮。地名。《前漢·地理志》魯國蕃。《註》邾國也。又《後漢·黨錮傳》蕃嚮。《註》蕃,姓也
[10]. 孟子 告子下:孟子居鄒,季任為任處守,以幣交,受之而不報。處於平陸,儲子為相, 以幣交, 受之而不報。他日由鄒之任,見季子;由平陸之齊,不見儲子。屋廬子喜曰: 「連得閒矣。」問曰: 「夫子之任見季子,之齊不見儲子,為其為相與?」. 屋廬子悅。或問之。屋廬子曰: 「季子不得之鄒, 儲子得之平陸。」 .
[11]. 孟子 萬章上: 『吾君之子也。』丹朱之不肖,舜之子亦不肖。舜之相堯,禹之相舜也,歷年多, 施澤於民久。啟賢,能敬承繼禹之道。孟子 告子下: 『吾君之子也。』丹朱之不肖,舜之子亦不肖。舜之相堯,禹之相舜也,歷年多,施澤於民久。啟賢,能敬承繼禹之道, 孟子曰:「子過矣。禹之治水,水之道也。是故禹以四海為壑,今吾子以鄰國為壑。水逆行,謂之洚水。洚水者,洪水也,仁人之所惡也。吾子過矣。」
[12]. 康熙字典 楸:中山又有楸戸,著名楸籍者也。《曹植·名都篇》走馬長楸閒。又苦楸。 楸, 美木也。一作萩。《史記·貨殖傳》淮北常山巴南河濟之閒,千樹萩,其人與千戸侯等。《詩·北山有楰疏》其樹葉木理如楸,山楸之異者,今人謂之苦楸是也。又楸枰,棊局也。廣韻 秋: 湫. 水池名北人呼. 《段成式·觀棊詩》閒對奕楸傾一壷。《沈彬詩》井里交連側局楸
[13]. 康熙字典 : 《古今字考》惡同滹,池同沱,卽滹沱河也 북인北人水池名北人呼. 廣韻 秋: 湫. 水池名北人呼. 呂氏春秋 離俗: 舜又讓其友北人無擇。北人無擇曰.
[14]. 康熙字典:《通志·氏族略》 薛氏有三: 奚仲之後,以國爲氏。又叱干氏攺爲薛, 又有遼西薛氏 . 史記 秦始皇本紀始皇東行郡縣,上鄒嶧山。立石,與魯諸儒生議,刻石頌秦德,議封禪望祭山川之事。 史記 六國年表: 鄒忌以鼓琴見威王. 二十二。封鄒忌為成侯.
[15]. 康熙字典: 楸:𠀤音秋。《說文》梓也。 《韻會》楸與梓本同末異,若檜之柏葉松身。 《爾雅·釋木》槐,大而皵,楸。小而皵,榎。則楸又槐屬也。《埤雅》楸梧早脫,故楸謂之秋。楸,美木也。一作萩。《史記·貨殖傳》淮北常山巴南河濟之閒,千樹萩,其人與千戸侯等。中山又有楸戸,著名楸籍者也。《曹植·名都篇》走馬長楸閒。又苦楸。山楸之異者,今人謂之苦楸是也。又楸枰,棊局也。《段成式·觀棊詩》閒對奕楸傾一壷。《沈彬詩》井里交連側局楸.
[16]. 方言:奕、偞,容也。自關而西凡美容謂之奕,或謂之偞。宋衛曰偞, 陳楚汝潁之間謂之奕.
[17]. 墨子閒詁 非儒下: 南郭惠子,尚書大傳略說作「東郭子思」,《說苑·雜言》篇作「東郭子惠」, 史記索隱 引世本, 陳成子弟有惠子得,或即此人。 子思 : 即「孔伋」: 孔伋,字子思,孔子的孫子。
[18].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 史記 列傳 仲尼弟子列傳. 史記/卷067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原憲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詩說 小雅: 《頍弁》:此燕王族之詩,賦中有比也
[19]. 孟子 告子下:白圭曰:「吾欲二十而取一,何如?」.孟子曰:「子之道,貉道也。 萬室之國, 一人陶, 則可乎?」。曰:「夫貉,五穀不生,惟黍生之。無城郭、宮室、宗廟、祭祀之禮, 無諸侯幣帛饔飧, 無百官有司,故二十取一而足也。今居中國,去人倫,無君子, 如之何 其可也? 陶以寡,且不可以為國,況無君子乎?欲輕之於堯舜之道者,大貉小貉也;欲重之於 堯舜之道者,大桀小桀也。」. 발조선 시대(發朝鮮 時代) « Lee Mosol’s Book Collection. 白圭 (东周)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20]. 論語 先進: 司馬喜,中山君之臣也,而善於趙,嘗以中山之謀微告趙王. 論語 先進: 公冶長 南容三復白圭,孔子以其兄之子妻. 詩說 召南: 《鄒虞》:美虞人之詩,賦也
[21]. 廣韻 :仉:姓梁公子仉䁈後也。孟子母仉氏。梁四公,一姓仉名䏿.《周禮》五几:玉几、雕几
[22]. 孟子 告子下:白圭曰:「吾欲二十而取一,何如?」.孟子曰:「子之道,貉道也。 萬室之國, 一人陶,則可乎?」。曰:「夫貉,五穀不生,惟黍生之。無城郭、宮室、宗廟、祭祀之禮,無諸侯幣帛饔飧, 無百官有司,故二十取一而足也。今居中國,去人倫,無君子,如之何其可也?陶以寡, 且不可以為國,況無君子乎?欲輕之於堯舜之道者,大貉小貉也;欲重之於堯舜之道者,大桀小桀也。」. 발조선 시대(發朝鮮 時代) « Lee Mosol’s Book Collection. 白圭 (东周)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23]. 加羅湖、加羅山初心者攻略 – 洛一山林 加羅湖 (Jialuo Lake) in Yilan County, Taiwan.
[24]. 三國史記 百濟本紀第五:十七年,高齊後主拜王為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 百濟王. 十八年,高齊後主,又以王為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25]. Silla from Zhina(Southern China) to Korean Peninsula. « Lee Mosol’s Book Collection
[26]. 孟子 盡心下:「『何以是嘐嘐也?言不顧行,行不顧言,則曰:古之人,古之人。行何為踽踽涼涼? 生斯世也,為斯世也,善斯可矣。』閹然媚於世也者,是鄉原也。」萬子曰:「一鄉皆稱原人焉,無所往而不為原人,孔子以為德之賊,何哉?萬子曰:「一鄉皆稱原人焉,無所往而不為原人,孔子以為德之賊,何哉?」, 恐其亂樂也;惡紫,恐其亂朱也;惡鄉原,恐其亂德
[27]. 史記 孟子荀卿列傳 : 孟軻,騶人也。受業子思之門人。道既通,游事齊宣王,宣王不能用。 適梁,梁惠王不果所言,則見以為迂遠而闊於事情。當是之時,秦用商君,富國彊兵;楚、魏用吳起,戰勝弱敵;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而諸侯東面朝齊。天下方務於合從連衡,以攻伐為賢,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是以所如者不合。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述仲尼之意,作孟子七篇。其後有騶子之屬。齊有三騶子。其前騶忌,以鼓琴干威王,因及國政,封為成侯而受相印,先孟子. 列女傳 : –母儀 -> 鄒孟軻母,自由的百科全书 .
[28]. 史記 孟子荀卿列傳 : 孟軻,騶人也。受業子思之門人。道既通,游事齊宣王,宣王不能用。 適梁,梁惠王不果所言,則見以為迂遠而闊於事情。當是之時,秦用商君,富國彊兵;楚、魏用吳起,戰勝弱敵;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而諸侯東面朝齊。天下方務於合從連衡,以攻伐為賢,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是以所如者不合。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述仲尼之意,作孟子七篇。其後有騶子之屬。齊有三騶子。其前騶忌,以鼓琴干威王,因及國政,封為成侯而受相印,先孟子. 列女傳 : –母儀 -> 鄒孟軻母,自由的百科全书 .
[29]. 史記 孟子荀卿列傳 : 孟軻,騶人也。受業子思之門人。道既通,游事齊宣王,宣王不能用。 適梁,梁惠王不果所言,則見以為迂遠而闊於事情。當是之時,秦用商君,富國彊兵;楚、魏用吳起,戰勝弱敵;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而諸侯東面朝齊。天下方務於合從連衡,以攻伐為賢,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是以所如者不合。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述仲尼之意,作孟子七篇。其後有騶子之屬。齊有三騶子。其前騶忌,以鼓琴干威王,因及國政,封為成侯而受相印,先孟子. 列女傳 : –母儀 -> 鄒孟軻母,自由的百科全书 .
[30]. 玉篇 弈:道既通,龏纪庸切弈余石切说文云围棊也具渠句切说文云共置也弃去至切古文弃废也 㢡子飬切助也弊毗制切俗𡚁字㢣渠京切举也𢍧猪利切置也,. 龏纪庸切弈余石切说文云围棊也具渠句切 说文云共置也弃去至切古文弃废也㢡子飬切助也弊毗制切俗𡚁字㢣渠京切举也𢍧猪利切置也. 康熙字典 棄:〔古文〕弃𢍞 𠀤音器。《說文》捐也。《爾雅·釋言》忘也。《詩·周南》不我遐。
[31]. 史記 孟子荀卿列傳 : 孟軻,騶人也。受業子思之門人。道既通,游事齊宣王,宣王不能用。 適梁,梁惠王不果所言,則見以為迂遠而闊於事情。當是之時,秦用商君,富國彊兵;楚、魏用吳起,戰勝弱敵;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而諸侯東面朝齊。天下方務於合從連衡,以攻伐為賢,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是以所如者不合。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述仲尼之意,作孟子七篇。其後有騶子之屬。齊有三騶子。其前騶忌,以鼓琴干威王,因及國政,封為成侯而受相印,先孟子. 列女傳 : –母儀 -> 鄒孟軻母,自由的百科全书 .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